영화에 대한 잡설들/오감만족... 이 영화 봤수?

'시리어스 맨'-한 남자, 인생의 회오리 바람에 휘말리다.

송씨네 2010. 4. 1. 16:48



코엔 형제의 영화들을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우선 빈틈이 없다는 것과 코미디와 드라마적 요소의 그 어느것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를 잘 버무리는 비결이 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비밀은 이미 이들이 형제 감독이라는 점과 공동 제작이라는 시스템에서 답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엔 형제의 신작 '시리어스 맨'은 말그대로 진지한 남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왜 그가 진지하게 살 수 밖에 없는지 삶을 드려다보면 전혀 웃을 수 없는 황당한 상황에서 그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1970 년대로 향하는 미국의 중산층을 비춰줍니다.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수 래리는 지금 여러가지로 복잡한 심정입니다. 대학종신재적권 심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상황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학생이 그에게 다가와 시험점수를 올려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뭔가 돈봉투를 건내고 간것으로도 보이고요. 투서도 날라오는데 그 한국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찹찹한 심정입니다.

집으로 돌아와도 그는 편하지 못합니다. 부인 주디스는 외간남자 사이(이름이 '사이'입니다.)와 재혼하겠다면서 남편인 래리를 압박하는데 눈치없는 자식들은 안나오는 TV 채널을 목숨걸고(?)보려고 하고 성형때문에 돈을 슬적하는 딸도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어이없게도 부인의 새 남편이 될 사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래리는 더욱더 꼬이게 됩니다. 이런 저런 고민에 휩싸인 래리는 랍비(제사장)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젊은 랍비부터 시작해서 정장의 중후한 중년의 랍비도 만나봤지만 토통 답을 구하지 못하죠. 아들의 성년식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원로 랍비를 만나려고 하지만 정작 그를 만난 사람은 래리의 아들인 대니였고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거대한 토네이도 같네요. 그 거대한 인생의 토네이도 속으로 래리와 대니가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들에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뜬금없이 주인공들이 당하거나 웃음을 주다가 어이없이 마무리가 된다는 것이죠.

늘 기존의 영화나 문학작품들의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이건 해피도 아닌 언해피도 아닌 애매한 결론인데 마치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 PD같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틀린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존의 훈남들을 망가뜨리는 것도 코엔형제이고 코믹한 사람들을 훈남으로 만드는 것도 코엔형제의 특기입니다. 전자는 브레드 피트나 조지 클루니가 대표적이고 후자의 경우는 토미리 존스가 그 경우죠.

코엔 형제는 전작인 '번 애프터 리딩'에서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를 같이 주무르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스릴러적 요소를 중시하면서도 유머 코드를 잊지 않았었죠. 어쩌면 '시리어스 맨'은 어떻게 보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에 더 까깝습니다. 대신 물고 뜯기고 피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다른 점이죠.




영화에 등장하는 래리 가족은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이지만 한편으로는 유태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종교적 신앙을 중시하는 것은 이들에게 당연한 일이지만 래리의 아들인 대니처럼 약간 빗나간 청춘들의 모습도 보여지고 있지요. 영화 속 래리는 이 불안한 줄줄이 비엔나스러운 사태를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랍비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으며 한 랍비는 한 치과의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대단한 반전이나 결말을 이야기할 것으로 이야기했지만 이 역시 아무런 소득도 못 얻고 래리는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래리와 더불어 많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의 아들인 대니인데요.

대니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신만의 자유를 만끽하지만 한 노 선생에게 라디오를 빼앗기고 맙니다. 하지만 그 라디오 안에는 한 덩치들 하는 녀석들에게 줘야하는 돈도 같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마초같은 것을 피워대는 것을 봐서는 분명 깨끗한 돈은 아님은 분명하죠. 가족과의 벽이 있는 이들 식구에게 대화는 없었고 단지 아들은 아버지가 TV를 고쳐주는 그런 남자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성년식의 상황에서도 대니는 해롱거리는 모습속에서도 그 위기를 잘 모면하지만 분명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주는 토네이도가 그것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 토네이도는 어떻게 보면 그의 아버지이자 가장인 래리에게도 불어오는 바람이라고도 보여집니다. 아들의 성년식은 무사히 넘겼지만 아직도 해결 못한 사건들이 산더미일테니깐요. 기존의 영화라면 이 사태를 모두 해결하고 막을 내리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코엔 형제의 영화가 맞냐는 의문이 들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기대에 어긋나게 하는 것이 이들 코엔 형제의 몫일테니깐요.







그렇지만 의문이 들었습니다.

굳이 1970년대를 앞둔 미국의 유태인 가정으로 이야기를 굳이 정할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죠. 지금 대입해도 사실 틀린 이야기들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높아만 가는 이혼률에 타락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틀린 것은 아닐테니깐요. 

래리에게 날라오는 투서는 트위터나 마이스페이스로 대체할 수 있고 대니 역시 그 만지작 만지작 거리던 소형 라디오 대신에 아이폰으로 대체해도 어색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무서운 것은 시대가 후퇴하던 전진하던 암울한 삶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멀쩡한 중년의 한 남자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이웃집 여자와 함께하는 모습도 어쩌면 매우 서글픈 우리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지금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바람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운명의 바람이거나 변화의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바람이 잔잔한 바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모든이들을 쓸어갈 정도의 거대한 회오리 바람에 휩싸이기에는 우린 아직 그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 변화와 운명의 회오리 바람은 자칫 우리에게 이익보다는 상처를 줄 것이 뻔한 일이 되어버릴테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