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잡설들/오감만족... 이 영화 봤수?

영화 '그랜토리노'☞깨어있는 보수, 클린트 이스트우드...

송씨네 2009. 3. 17. 23:13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의, 또 주의 바랍니다.

 

 

 

나는 보수주의자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진보주의자이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진보라고 외치는 사람 혹은 보수라고 외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들 밖에 모르는 이들이 있는데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떨까?

많은 이들이 그를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참 이상하다, 그의 영화에는 보수주의적 색체가 티가 나도록 드러내지 않으니 말이다.

거기에 자칫 그의 나이가 고령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고집쟁이 늙은이로 생각될 가능성이 있지만 오히려 그는 열린 생각을 같고 있는 제법 열린 생각의 보수주의자라는 것이다.

전작 '체인질링'이 개봉되고 연달아 이번에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그랜토리노'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유료 시사로 조금 일직 본 그의 영화 '그랜토리노'...

영화 속 월트라는 노인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오래된 그의 애마 그랜토리노처럼 어쩌면 이 영화는 그의 자존심을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진다.

 

 

 

 

월트는 사랑하는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 그렇게 홀로 작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지만 아들이라는 놈들도 그렇고 손자, 손녀라고 하는 것들도 하나같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손녀는 창고의 월트가 애지중지하는 그랜토리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월트는 포드 사에서 몇 년을 그렇게 일을 했고 그의 애마인 그랜토리노는 하나 밖에 없는 그의 보물이다.

한국전을 참전한 그는 빛나는 훈장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으로 많은 이들을 학살해야만 했다는 생각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사를 했다.

사람들은 월트 집에 먹을 것과 꽃을 들고 나타지만 그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는 이해를 하지 못한다.

밤이 되자 그 집의 청년인 타오는 월트의 그랜토리노를 훔치다가 우여곡절 끝에 붙잡히고 그가 바로 옆집의 몽족 사람들 중 한 명임을 알게 된다. 타오에 이어 말괄량이 아가씨인 수와도 친해지면서 고집쟁이 영감 월트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사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어렵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월트는 한국전을 참전한 군인이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이 영화에서 월트가 참전한 한국전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두번째는 월트의 이웃인 몽족이다. 주로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시아 북부 산악지방에서 거주하고 있다1는 것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호족에 대한 정보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 낮선 사람들에 대한 정보부터 알고 봐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이 영화는 어렵지도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전작들을 보면 그가 과거 총을 잡고 총질을 하던 영화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우리들 소시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으니깐 말이다. 심지어는 '아오지마에서 온 편지'나 '아버지의 깃발'과 같은 2 부작으로 된 전쟁이야기에서도 사실 미군이건 일본군이건 어느 누구도 승자도 패자도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결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영화를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으며 강제로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알아서 관객들이 이해를 해주길 바라는 것이며 실제로도 알아서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고 있으니깐 말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작은 이야기에 속한다.

한 노인이 애지 중지하던 자동차가 있었는데 그 자동차로 인해 이웃집 청년과 처녀에게 관심을 갖았고 아울러 그 가족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족들을 해치는 몽족 갱단들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노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초반의 아주 작은 총격씬이나 싸움을 가지고 본다면 이 영화는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점차 복수극으로 발전하면서 월트도 몽족 사람들과도 돌이킬 수 없는 아픔속으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자칫 월트가 그 갱단에게 총을 난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었다.

아무래도 복수극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이 리뷰의 제목을 '여전한 정의의 수호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으로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영화 속 노인 월트도 의외의 결정을 하게 된다.

 

바로 희생이다. 영화에서는 월트에게 참회하라고 매일같이 오는 신부님이 있다.

월트의 부인도 교회(여기서는 정확히 성당)를 다녔던터라 월트에게도 어쩌면 부인의 마지막 유언인 참회하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신부에게 전해달라고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트는 그런 그의 요청을 계속 거절한다. 그리고 갱단과의 마지막 설전을 앞두고  신부에게 참회를 한다. 참회 내용도 상당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찌질한 단순한 참회였지만 그가 한국전에서 느꼈던 고통만큼이나 불안했던 자신들의 과거를 참회함으로써 마음속에 평화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신부의 이야기가 의외이다. '만약 내가 월트였다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눌 것이다'라는 식의 대사였다.

평화를 주장하던 신부가 왜 갑자기 월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한 것일까?

월트는 젊은 신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스물 일곱의 나이에 신학생에서 신부가 된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인데 삶은 알아도 죽음은 모를 것이라는 것이 월트의 생각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신부는 월트가 이야기하는 삶과 죽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도 감소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희생으로 인한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거기서 또 하나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 밝지 않지만 앞으로 보여질 큰 희망을 말이다.

이는 그의 전작 '체인질링'에서도 보여진다. 결국 영화속 콜린스 부인(안젤리나 졸리)는 아들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막을 통해 그 후로도 콜린스 부인은 희망을 갖고 아이를 찾는 일에 더욱 힘을 섰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 속에도 등장했지만 황폐화 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살아남은 한 소년이 어머니와 재회를 하는 장면에서가 아닐까 싶다. 그것을 보면서 콜린스 부인은 눈물을 흘렸고 그 아이처럼 자신의 아이도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큰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작은 1%도 그들에게는 큰 희망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느낌의 보수주의자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남들은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속에 열린 결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그랜토리노'로 돌아와서...) 그는 희생을 통해 평화를 주었고 그 평화는 몽족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희망찬 내일을 줄 것이라는 암시를 하게 된다.

타오에게 월트의 희망이자 보물같은 존재인 그랜토리노를 선물하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본다.

월트에게는 마지막 자존심이자 그가 살아가는 이유를 보여주듯 어쩌면 마지막 장면에서 타오가 오래된 그랜토리노를 끌고 미지의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앞으로의 밝은 미래만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고집쟁이 늙은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는 비록 보수주의자가 싫지만 이런 개방적인 보수주의자라면 환영하는 바이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든을 향해가는 그가 오랫동안 많은 작품을 더 보여주길 희망한다.

(지난번에도 하던 이야기 같은데 이번에도...) 부디 만수무강하시길....

 

 

 

PS. 이 영화는 비슷한 영화를 찾기가 힘들어 공란으로 남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영화가 비슷할지 생각이 안난다.

혹시 이 영화와 비슷한 영화가 생각나시는 분들은 댓글 부탁드린다.

 

 

 

  1. 씨네 21의 695호 김도훈의 가상 인터뷰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