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의 첫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였습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아버지 손을 잡고 본 홍콩 영화 '호소자'도 있었습니다만 제 스스로 선택하고 시사회를 본 영화가 바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였으니깐요.
지금은 전설이 된 영화잡지 키노에서 열린 온라인 시사회... 그것도 이메일을 통해 시사회 참여자를 받었던 나름 획기적인 시절이었으니깐요. 그리고 역시 전설이 되어버린 동숭시네마텍에서 보았으니 할 말 다했죠.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영화였습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제그 3 부작 중 하나였지요. 하지만 당시 이 영화는 어려웠습니다. 아니, 어려웠다기보다는 지루했죠.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한 제가 고 2였는데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피곤도 몰려오기에 키아로스타미 영화는 수면을 몰고오는 영화였으니깐요.
그러고 보니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본 것은 오래간만이었습니다.
재개봉 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후 정말 오래간만이죠. 사실 그의 영화를 국내에서 본다는 것도 쉽지도 않죠.
서두가 길었네요.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사랑을 받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여전한 미모를 뽐내던 줄리엣 비노쉬가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멋진 댄스를 선보였던 것이 불과 작년일이네요.
키아로스타미의 여전히 어렵고 지루하지만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영화 '사랑을 카피하다'입니다.
영국에서 잘 나가는 작가 제임스는 이탈리아로 와서 자신의 출판 설명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책의 제목은 '기막힌 복제품'(Copie conforme)... 원본과 복제품에 대한 경계는 없다는 것이 그의 책의 내용이었지요.
잠시 후 설명회 도중 한 여인이 현장을 찾아왔습니다.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아들 성화에 못이겨서 나오는 중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엘르로 골동품 가게를 운영중입니다. 원본과 복제품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이지요. 팬과 작가로 만난 두 사람은 제임스가 돌아가기 전까지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을 향해 드라이브를 즐기기로 맘먹습니다.
그런데 차 안에서 이 두 사람 서로 티격대격입니다. 생각이 너무 달라도 다르지요. 박물관에서, 조각상에서, 레스토랑에서 이들은 시시콜콜 테클에 싸움입니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이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결혼한지 15주년이 된 부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카페 주인이 오해하기 시작했지만 그 오해를 그냥 자연스럽게 엘르가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임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다가오고 있고 이들은 그렇게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경계가 사라져 어디가 진실이고 어디가 거짓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죠.
앞에 이야기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제그 3부작에 마지막에 해당되는 시점인데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출연한 소년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행적을 따라기 위한 감독의 여정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키아로스타미가 그 감독 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랬더라면 이 영화는 다큐가 되었을테니깐요. 하지만 이 영화는 다큐도 아닌 것이 극영화도 아닌것의 애매한 경계를 왔다갔다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를 쉽지만 한편으로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영화였다는 것이죠. 고 2 소년이었던 당시 저에게는 말입니다.
'사랑을 카피하다' 역시 이런 키아로스타미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겁니다. 작가와 팬으로 만난 두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부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 두 사람이 정말 부부였는가를 이야기하는 대목도 없으며 관객에게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아니었겠지요.
현실과 비현실을 달리는 점에서 최근 한 방송국에서 방송하고 있는 '우리 결혼했어요'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이는 어찌보면 키아로스타미 버전의 '우리 결혼했을까요?'가 아닐까 싶어집니다. 결혼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넌센스처럼 던지고 있다고 있다는 것이지요.
키아로스타미가 말하는 가상 결혼은 아마도 엘르와 제임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요. 결혼 15 주년차의 커플에서 느낄 수 있는 권태기와 의견충돌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요. 와인 한 잔을 마심에 있어서 서로 다른 생각을 보이고 자녀에 대한 생각을 비롯한 이것저것 서로 다른 남녀의 다른 생각을 볼 수 있는 대목들이죠. 하지만 정말로 웃기는 것은 그것을 어디가 진실이며 어디가 거짓인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는 그 경계선을 하나도 긋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는 이 영화의 제목(원제인 Copie conforme, 즉 '기막힌 복제품')과도 상당히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가상결혼을 이야기함으로써 과연 결혼이나 사랑이라는 것도 조작이나 복제가 가능하냐의 의문일 것입니다. 15주년차 부부 행세를 하는(혹은 진짜 부분일 수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사랑은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조작되고 그 가상 결혼(동거 포함)이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영화에서 박물관을 견학가다가 복제품이 오히려 원작 만큼 사랑을 받은 일화를 소개한 대목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조작이던 그렇지 않던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또 다른 창작품이며 결혼 역시 그것이 가상결혼이 되었건 동거가 되었건 현실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점에서 앞에 이야기한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가상으로 아닌 현실에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수다쟁이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대화이며 음악이나 자연풍경도 줄인 상태에서 이들의 모습과 수다를 비춰줍니다. 이런 점에서는 그는 우디 앨런이나 쿠엔틴 타란티노와도 유사합니다.
물론 우디 앨런이 생활 속 수다를 이야기한다면 쿠엔틴 타란티노는 대화속에서도 익스트림(모험)을 즐기려는 모습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키아로스타미는 우디 앨런의 수다에 더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생활속에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사건을 수다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간만에 보는 줄리엣 비노쉬는 참 반가웠습니다.
나이들면 주책이거나 그 미모가 예전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쉽지만 그녀의 미모는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립스틱을 바르고 귀걸이를 끼우는 등의 매력을 뽐내려는 그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귀엽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줄리엣 비노쉬처럼 멋지게 늙는 배우들을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들어서 말이지요.
'사랑을 카피하다'는 지루한 영화입니다. 극적인 상황도 없고 영화의 대부분을 대화로 때웁니다. 어쩌면 그의 전작들인 영화들이 오히려 전개도 있고 지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술작품만 복제하는 것이 아닌 결혼 생활도 사랑도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음을 키아로스타미는 증명하려고 했던 것 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점에서 '사랑을 카피하다'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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