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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봉인]고전으로 보는 우리가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송씨네 2012. 5. 12. 12:19

 

 

 

죽음은 과거 금기시되던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희화화할 수 없는 소재이고 웃음으로 소화하기도 어려우며 죽음을 의인화한다는 것도 힘든 일이죠.

어쩌면 이제는 고전으로 남은 1957년 작인 <제7의 봉인>은 죽음에 대한 의인화와 금기된 소재를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던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작품은 지금 21세기에서도 여전히 명작으로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흑백으로 만들어지고 필름 시대 작품이라는 점에서 필름만의 그 거칠함이 있었을 텐데 이런 작품을 디지털로 복원하였습니다.

깔끔하게 재탄생된 명작 <제7의 봉인>입니다.

 

 

14세기 중엽...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안토니우스 블로크(막스 폰 시도우 분)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흑사병이라 불리워지는 페스트로 온 나라는 황폐해져 있고 거리마다 시체와 자신 혹은 남의 몸을 자해하면서 구원의 길을 달라 요청하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충직한 하인인 옌스(군나르 비욘스트란드 분)를 데리고 향하던 길에 그는 죽음(저승사자/벵트 에케로트 분)과 마주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기지를 발휘해 죽음과 체스게임을 제안합니다.

죽음과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안토니우스와 옌스는 많은 사람들은 만납니다. 그 중에는 거리의 곡예단으로 활약하는 요프(닐스 포페 분)와 미아(비비 앤더슨 분) 부부도 만나게 되지요. 스캇(에릭 스트랜드마크 분)이라는 단원이 한 명 더 있었지만 매춘부 출신의 여인 리사(잉가 길 분)에게 빠져 도망가고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출신의 플로그(아케 프리델 분)은 그녀를 찾으러 이들 안토니우스 일행에 동참합니다. 한편 겁탈에 물건까지 훔치려는 사내를 물리친 옌스는 거기서 한 소녀(군넬 린드블롬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 역시 이들 일행에 동참합니다.

악마 같은 죽음은 계속 이들 일행을 쫓아오고 다른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를 계속 만나게 되지요.

자신의 눈에만 특이한 환영이 보이는 요프는 안토니우스와 죽음이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불안감에 부인인 미아와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안토니우스의 집에 도착한 일행들은 다시 죽음과 마주치게 됩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상당히 복잡할 것만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죽음을 피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영화이기도 하죠.

영화의 제목인 <제7의 봉인>은 요한 묵시록 8장에 1절부터 13절까지에 이르는 대목을 이야기한 부분입니다. 상당히 긴 내용이지만 한번 살펴보도록 하죠.

 

어린양이 일곱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하늘에는 반 시간가량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에게 일곱 나팔을 주었습니다. 다른 천사 하나가 금 향료릏 들고 나와 제단 앞에 서자, 많은 향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성도와 기도와 함께 어좌 앞 금 제단에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사의 손에서 향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뒤에 천사는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천둥과 요란한 소리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 났습니다. 그때에 나팔을 하나씩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였습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생겨나더니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땅의 삼분의 일이 아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 버렸습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하여 바다의 삽분의 일이 피가 되고, 생명이 있는 바다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부서졌습니다.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횃불처럼 타는 큰 별아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샘들을 덮쳤습니다. 그 별의 이름은 쓴흰쑥 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물의 삼분의 일이 쓴흰쑥이 되어,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쓴 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하여 낮의 삼분의 일이 빛을 잃고 밤고 그렇게 되었습니다.나는 또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나는 것을 보고 그것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블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땅의 주민들! 아직도 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소리가 남아 있다."

 

좀 길죠? 이 대목은 실제 영화의 첫부분과 끝부분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첫 부분은 자막으로, 끝 부분은 죽음(저승사자)을 맞이하기 전 안토니우스 일행이 요한 묵시록을 읽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저도 과거 나름 카톨릭 신자였지만 종교적인 입장에서 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도록 할까 합니다. 제 블로그는 영화블로그이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곳이 아니니깐요.)

 

이 영화에서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인류의 멸망을 다가오게 할 하나의 불안한 암시라는 것과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게 갑자기 찾아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예고가 된 상황이라는 것이죠. 안토니우스가 체스 게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늦추려는 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해성사를하는 장면에서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죽음을 늦추고 싶다는 의미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늦출 수는 있어도 그 죽음은 나이가 들고 병이나고, 운이 나쁘면 살인이나 교통사고로 죽게 될 것이고 자살과 같은 잘못된 선택으로도 죽음은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죠. 언젠가는 어떻게든 사람은 죽는다는 겁니다.

 

 

 

 

 

아무래도 고전 영화들은 좀 지루한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흑백화면일 경우 컬러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이런 영화를 집중해서 보긴 힘들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부분에서는 <제7의 봉인>은 상당히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아 & 요프 부부와 함께 곡예단에서 활동하던 스캇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죽음을 만나 세상을 떠나는 장면은 한 편으로는 코믹한 장면이라고 봅니다. 죽음을 회피하려고 하지만 운명은 결국 어떻게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위의 스틸컷에 등장하는 안토니우스 일행이 죽음에 이끌려 손에 손을 잡고 나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섬뜩한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상당히 코믹한 장면으로도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줄줄이 사탕으로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죠. 마치 이들은 춤을 추는 듯한 모습으로 죽음에 이끌립니다. 이 장면은 정말로 섬뜩한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스틸컷으로만 보면 코믹하게 보이는 것은 감독인 잉마르 베리만이 의도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네요.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블랙 코미디일지도 모를 테니깐요. 희한한 것은 최근 죽음을 소재한 영화들의 특징이 아주 어둡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를 약간 유머 있게 그린 예도 있지요. 최근 개봉한 <50/50>이나 <청원> 같은 영화를 보면 죽음이 어쩌면 하나의 축제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쾌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대목들이기도 하죠.

 

한편으로는 <제7의 봉인>은 로드무비 같은 영화이기도 하죠. 1957년도 영화에 무슨 로드무비냐고 되물으시겠지만 자세히 보시면 이 영화는 안토니우스가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많은 사람을 만나는 여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고 점점 이들과 함께하는 인물의 숫자는 늘어나게 되지요.

어느 곳을 지나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도 발생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영화는 고전영화임에도 로드무비적인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혹은 악마)은 항상 뒤에 있다는 여인의 이야기가 영화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죽음은 아무 때나 오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인가요? 한 여인이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운 좋게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는 뉴스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사람은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순리대로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가장 행복한 죽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며 자식들과 많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 아닐까요?

순리를 어기고 살인하며 급한 마음에 과속하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게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세상 살기 어렵다면서 자살하려는 사람들...

분명한 것은 당신들이 그런 어긋난 생각을 하는 동안 죽음은 바로 당신 뒤에 가까이 다가와 당신의 목을 조여올 것으로 생각하네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저는 그게 무섭네요. 생각만 해도 말입니다.

고전으로 사랑받는 <제7의 봉인>은 그런 점에서 고전 이상의 걸작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PS. 이 작품은 영화 수입과 배급, 상영을 주로 하는 영화사 백두대간이 수입한 작품입니다.

흑백이고 고전입니다. 하지만 너무 상영관이 적네요. TV에 방영된 적이 있는 작품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다 봤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적어도 한두 곳의 상영관을 더 늘려주셨으면 하는 생각도 가져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