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대한 잡설들/오감만족... 이 영화 봤수?

아버지의 깃발-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 이야기, 하나...

송씨네 2007. 2. 20. 20:35

 

 

제 2차 세계대전이 있던 시절...

그리고 그 끝을 향해 달려가던 1945년 일본의 자그마한 섬 이오지마...

대대적인 폭격에 이어 미군은 2월 19일 이오지마에 상륙한다.

닷새면 가능... 그러나 사흘안에도 가능하다는 전망속에 이들은 이 곳에 성조기를 꽃을 날을 기다리며 일본군과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을 치룬다.

3월 26일... 모든게 끝났고 그들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그리고 사진 한장... 이 사진 한장이 미국의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사진속 주인공들은 영웅대접을 받으며 금의환향한다.

 

위생병 닥, 인디언 출신의 아이라, 그리고 전령인 개그논까지...

많은 이들의 환영속에 그들은 여러 만찬회와 행사에 불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정부의 지침대로 전쟁 보급품 기금마련을 위한 채권 판매 광고를 강요한다.

하지만 강요받는 기분보다도 더 힘든 것은 자신들보다 더 피흘리며 싸워간 다른 전우들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십년이 지난 뒤 닥은 세상을 마감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의 아들 제임스는 아버지와 함께 전장 속으로 뛰어든 젊은이들의 과거를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피해자는 누구이며, 가해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진짜 진실은 무엇일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이 영화 공식포스터 버전의 '유황도'말고 진짜 오리지날 '유황도'라는 작품을 찾고 싶어서 되지도 않은 영어를 검색창에 집어넣으면서 찾아보았다.

1945년 사진작가 존 로젠탈의 작품인 '유황도'는 바로 '이오지마'를 한문식으로 바꾸었을 때 나온 이름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도 등장하며 실제 일본의 섬중의 하나인 아오시마는 유황냄세가 코를 찔렀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으로 존 로젠탈은 그 해 기자들게 주어지는 권의있는 상인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사진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것을 파해지고자 바로 이 작품 '아버지의 깃발'을 만들었다.

이는 미군의 입장에서 보여지는 이야기이며 바로 다음에 만든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바로 상대편인 일본군의 입장에서 본 이야기로 이렇게 두 편을 연속 제작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영화 '아버지의 깃발'의 원작은 동명제목의 소설인 제임스 브레들리의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존 닥 브레들리의 실제 아들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앞에 말한 세 명의 사람들은 깃발을 단 사람들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두번째 깃발을 달았던 사람들에 불과하며 진짜 깃발을 달았던 사람들은 사진 뒷편에 사라져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그리고 눈치없는 일부 언론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고 한 순간에 스타가 되었다.

세 명의 젊은이는 금의환향 했지만 정부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들을 이용해 전쟁기금을 더 따내려는 목적이었다.

그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있음에도 그들의 말은 묵살당했고 반강제적으로 모금을 유도하는 연설을 하러 다녀야만 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의 정부와 언론의 조작을 보면서 요즘의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을 누군가가 띄우면 언론이나 일부 위력있는 단체는 그 사람을 더 띄우려고 한다.

그 사람의 선행이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상업화시켜 이용해먹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 사람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을 이용한 그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만약 1945년 인터넷이 있었고 휴대폰이 있었으며 통신수단이나 언론메체가 발전된 상황에 이들 세 명의 청년이 다른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팬클럽이 생기고, 관련 UCC와 인터넷 언론의 칭송이 가득찰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는 급속도로 크게 오를지 모르지만 그 인기도 금방 사라질 것이다.

언론이나 정부, 영향력있는 사회단체는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비겁한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영웅이 된 사람은 집중적으로 이들에게 칭송과 칭찬을 받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인기는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들도, 언론도, 사회단체나 정부도 그 사람들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필요에 의해 쓰여진 사람들은 속된말로 단물만 빨아먹고 도망치는 껌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존과 그의 전우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말미에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세상을 등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들이 나머지 4명의 전우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그들은 이용만 당할 뿐이고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전쟁으로 싸우다 돌아가시거나 다치신 분들에 대한 모습이 언론에 가끔 비춰지곤 한다.

그들 역시 영웅대접을 받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그나마 영웅대접을 받는 분들은 행복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은 상태에서 싸우다가 돌아가시거나 다치신 분들 중에는 정부나 사회, 그 어떤 곳에도 지원을 못받고 영화 속의 아이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분들도 많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그들 덕분인데 세상은 그들을 너무 금방 잊고 있으며 전쟁 영웅 뿐아니라 선행을 벌이다가 불의의 사고로 다치거나 세상을 등지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 역시 잠시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누가 진짜 깃발을 꽃았는가도 중요하지만 과연 진정한 영웅은 누구이며 우리는 그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정말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느냐는 것이다.

마치 뚝배기처럼 금방 끓다가 바로 식어버리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말이다.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점인 것 같다.

약자의 편에도 강자의 편에도 서서 같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말이다.

간혹 내가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할 때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되도록 중립을 지키려고 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황희정승식 중립론'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 두 편을 통해 어느 쪽으로 기울이지 않는 '황희정승식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이 다른 전쟁영화나 다른 미국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영화들과 철처히 비교되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서민층 이야기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은 서정적인 이야기 뿐만아니라 매우 심각한 이데올로기까지 파고들면서 다양한 주제의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대형 블록버스터 중심의 영화를 만드는 멜 깁슨과도 역시 비교가 된다.

 

 

 

최근 많은 영화 마니아들이 '아버지의 깃발'을 보고 나서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의 개봉 역시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동전에 앞면이 있고 뒷면이 있듯이 '아버지의 깃발'이 동전 앞면이라면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는 뒷면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당연히 '이오지마로부터 온 편지'의 개봉은 필요하다고 본다.

이 결정 사항은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측에 있다고 생각한다.

워너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들여온 만큼 속편에 대한 상영책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