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내 인생의 영화를 묻는다면 세 편 정도가 있다.
나에게 첫사랑의 느낌을 알려준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 그리고 천제 시인과 우편배달부의 우정을 그린 '일 포스티노'...
그리고 바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이다.
사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가 나에게 있어서 첫 단독 영화감상의 첫번째였으며 독립, 예술영화 관람에 있어서도 첫경험인 영화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대학로의 동숭 시네마테크는 인디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사라져서 아쉽지만 다행인 것은 동숭 시네마테크를 대신한 '하이퍼택 나다'가 있어서 아쉬움은 덜하다.)
1998 년의 일이다. 시사회로 당시 처음 봤던 영화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였다.
한 영화감독이 자신의 영화속 주인공들을 찾는 이야기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지그제그 3 부작을 정리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감독은 아들과 차를 통해 길고 긴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바로 그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소개할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다.
정작 지그제그 3 부작의 마지막 편을 보았음에도 이 작품의 시발점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이 영화를 당시 수입했던 백두대간 측에서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들이 뽑은 다시보고 싶은 영화로 선정되어 재상영에 들어간 것이다. (백두대간의 자회사이자 극장으로 운영중인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현재 절찬 상영중이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교실의 문 장면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된다.
이란의 코케라는 마을의 한 초등학교에 선생님이 들어온다.
다름아닌 숙제검사 때문이다. 아이들은 바짝 긴장을 하고 항상 어느 학교나 어느 나라를 가건 간에 나오는 숙제 안한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걸리게 된다.
공책을 사촌에게 줘버리는 바람에 공책도 없이 빈종이 한장으로 숙제를 해온 네마자데에게 선생님은 한 번만 더 그러면 퇴학을 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벌써 이번이 세번째였기 때문이다.
같은 교실 사촌에게 공책을 넘겨 받은 네마자데는 숙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뿔싸... 이번에는 그의 짝꿍인 아마드가 실수로 그의 공책을 가지고 집으로 가지고 와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네마자데가 사는 마을이 건너면 먼 동네 마을이다.
아이 좀 돌봐라, 빵을 사가지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는 어머니의 눈을 몰래 피해 아마드는 네마자데의 공책을 들고 머나먼 여정을 떠나게 된다.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딱 한 줄로 요약된다.
'짝꿍 아마드가 그의 친구인 네마자데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내용'이라고 이야기해도 맞는 이야기고 '친구 공책 돌려주러 가는 영화'라고 더 짧게 표현을 해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작년도는 1987 년이며 이란의 마을들은 지금이나 과거나 풍족한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책 한 권을 돌려주기 위한 여정은 그렇게 만만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란 영화들의 특성은 매우 단순하다. 절정이나 위기가 없으며 선과 악이 특별히 구분되지 않는다.
같은 아랍 계열인 인도 영화들이 다양한 레파토리와 신나는 음악이 등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란 영화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두운 분위기가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천국의 아이들'이나 '하얀 풍선'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키아로스타미 감독과 같은 이란 감독들의 분발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면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은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마드는 착한 소년이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소년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할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을 무시하고, 친구의 바지와 비슷한 바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동네 주민에게 꼭 그 바지의 주인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퇴학 위기의 친구를 구하기 위한 아마드의 눈물 겨운 노력이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계속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는 사과 장수 장면이라던가 그 외의 다양한 장면에서 등장한다.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속된 말로 씹히거나 등의 상황이 코믹하게 연출되는 이 영화는 오히려 블랙코미디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는 느낌마져도 들었다.
영화에는 공책을 돌려주러 가는 아마드의 여정만큼이나 재미있는 애피소드가 등장한다.
우선 아마드의 할아버지와 동네 할아버지의 대화 내용이 그것이다.
우리 때는 맞고 자랐고 요즘 아이들도 그래야만 한다는 시대 착오적인 발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그럴것이 이란 문화는 과거에 비해 나아지긴 했지만 여성들의 문맹률이 여전하다는 점이라던가 농경사회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란 영화들에서 많이 반영되고 있는 사실이다. '천국의 아이들 2'로 기억되는데 여건이 되지 않아 학교를 못다니는 소녀가 등장하는데 여건이 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남성우월주의가 이란과 같은 아랍권 국가에서도 남아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아마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아랍권에 뿌리 깊히 박힌 고정관념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껀수를 찾아서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혼을 내야한다는 대사가 등장하는데 같이 대화를 나누는 할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껀수가 없다면 어떻게 애야하냐고 묻자 만들면 된다는 대사는 사실 조금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것이 그들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화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이란의 영화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영화에서는 대문을 만드는 두 명의 장인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철문을 만드는 중년의(그래도 좀 젊은)의 남자이고 하나는 끝까지 나무 판자로 만든 대문을 만드는 노인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드가 네마자데를 만나러 가는 여정에 거의 마지막에 만나는 인물은 바로 이 노인이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는데 젊은 사람들이 요즘 너무 쇠로 만들어진 문만 선호한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세월이 지나면 알 수 없는 법이라는 신세 한탄과 더불어 도시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이야기하면서 차라리 이 곳의 삶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대목도 등장한다.
도시화, 산업화는 어느 나라에게나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지만 이에 대하여 이란 영화들의 대부분이 비판어린 목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 이후 두 번째로 만들어진 '올리브 나무 사이로'와 세번째 지그제그 3 부작의 마지막인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연결고리가 되는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지진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방문하는 감독의 여정을 다룬 영화인데 그가 마을을 방문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의 전작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등장한 소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영화는 다큐의 느낌이나는 극영화로 만들어졌다.
고물 자동차를 끌고 가면서 결국 청년이 된 아마드를 만났는지는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을 대표하는 감독이지만 영화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수면제 감독으로 이미 정평이 났다. 그 정도로 쉬운 이야기의 구성을 어렵게 풀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에 그렇게 겁을 먹으실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들에는 삶을 사는 지혜도 같이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 숨은 의도만 알고 있다면 당신도 충분히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팬이 될 수 있을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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